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오다이 황제 (문단 편집) == 빙쑤옌 문제 == [[파일:external/i780.photobucket.com/4665478774_6bcc7a8336_o1-1.jpg]] 빙쑤옌의 보스 '바이비옌(Bảy Viễn)' 레반비옌(Lê Văn Viễn, 黎文園) 겉보기엔 멀쩡하게 생겼다. 그밖에도 큰 비난거리 중 하나가 [[베트남 마피아|베트남 갱단]] 기반 군벌 세력인 빙쑤옌(Bình Xuyên, 平川, 평천)을 휘하 부대로 둔 점이다.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Nu-Anh Tran [[교수]]의 글에 따르면, 빙쑤옌은 당시 남베트남 지역에서 반[[베트민]] 성향을 지녔던 3대 군벌 분파 중 가장 작은 세력이었는데, 종교 기반 군벌이었던 나머지 둘과 달리 유일하게 그 근본이 깡패 조직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저 반불 성향 때문에 일본에 협력한 나머지 두 군벌 분파들과 달리 빙쑤옌은 진짜로 일본의 잔학행위에까지 협력하며 악명을 떨쳤는데 일본의 베트남 침공 당시 친일파가 되어서 항일 베트남인들을 가혹하게 학살하고, 그 식솔 및 마을 사람까지 팔다리를 잘라버린 일까지 저질렀다. 그런데 빙쑤옌은 정작 [[일본군]]이 베트남에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자 이번엔 정반대로 친일파 베트남인들을 돌아다니며 죽여버렸고 그 식솔들 팔다리를 잘랐다. 즉 [[기회주의자]] 집단. 그 빙쑤옌의 보스이던 바이 비옌[* 1904년~1971년. Bảy Viễn. 본명은 레반비엔(Lê Văn Viễn, 黎文園).]을 친위대장으로 임명하고 대장 계급을 쥐었던 점은 두고두고 비난거리. 이게 응오딘지엠 탓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되려 그 응오딘지엠이 이걸 반대했었다. 그 지엠조차도 빙쑤옌을 세균덩어리라고 멸칭할 정도였으며 민중들에게 어떤 반응을 받았는지 알만했다. 사실 바오다이가 자기 휘하에 확실히 부려먹을 수 있을 만한 세력이 빙쑤옌 뿐이던 건 사실이다. 일단 베트남국 자체가 프랑스의 괴뢰 정권이라 바오다이가 프랑스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베트남국의 정규군은 바로 바오다이에게 총칼을 들이댔을 확률이 높다.[* 물론 응오딘지엠은 재빨리 수뇌부를 제거해버리고 자기 편으로 만들었으니, 그저 능력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듯.] 베트민은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호치민은 말로는 그를 우대해줬다곤 하지만, 응오딘지엠도 통수쳐서 납치하고, 호아하오교와 [[까오다이교]]랑 연합 맺고 프랑스랑 싸우자고 해놓고는 그 지도자들도 통수쳐서 납치하고, 심지어 죄없는 지방 유지들도 통수쳐서 협박하는 등 그야말로 통수의 달인이었던 작자들이 40~50년대의 베트민이라 이들과 협력했다가는 자기도 언제 통수맞고 목숨을 위협받을 지 몰랐을 것이다. 다른 두 종교 군벌들은 세력도 강대하고 빙쑤옌보다 도덕적으로는 우위에 있었으나, 자신들의 종교 지도자들의 신병이 베트민에게 위협받자 베트민과의 연합을 깨고 프랑스와 협력한 행적으로 볼 수 있듯이[* 물론 이건 먼저 통수를 친 베트민의 잘못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입장에 따라 행동하는 면이 강했기에 동맹이면 몰라도 휘하에 넣고 부려먹을 수 있는 세력은 절대로 아니었다. 물론 프랑스와의 협력에 반발하고 자기만의 강력한 군벌 세력을 순식간에 조직해서 베트민과 프랑스 양쪽과 맞서 싸운 [[찐민테]] 같은 독종도 있었지만, 애당초 찐민테가 자기 종교 주류와 다른 행보를 보였던 이유가 뭔지를 따져보면 과거부터가 프랑스와 깊은 연관이 있던 그가 과연 찐민테를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https://escholarship.org/content/qt4407j6sj/qt4407j6sj.pdf]] ] 참고로 응오딘지엠은 바오다이 황제가 퇴위하자마자 빙쑤옌을 군대로 뭉개버렸다. 빙쑤옌은 그냥 조직폭력배나 정치깡패의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의 군벌 세력이나 다름없었기에 경찰로 뿌리뽑을 수 없었던 걸 지엠이 알았던 거였다. 참고로 빙쑤옌 소탕전은 거의 내전세력 소탕과 똑같을 정도였는데 기관총은 기본이고 박격포에 일부 빙쑤옌은 남베트남군에 대포로 응전할 정도였다. 그래도 결국 빙쑤옌 다수를 뭉개면서 간부들을 공개 총살시켜버리며 거의 뿌리를 뽑았다. 바이비옌은 [[프랑스]]로 도망가서 살다가, [[1971년]]에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는데, 참고로 1956년, 남베트남 법원은 궐석 재판으로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파리에서 몇 번이나 [[암살]]을 당할 뻔했는데 갱조직 문제로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빙쑤옌을 미국도 안 좋게 봤기에 거기를 뭉갤 때 미국에서 격찬하며 지지했다. 반대로 빙쑤옌 일로 바오다이는 더더욱 욕을 처먹을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허수아비로 자라나서 저렇다는 변명도 있겠지만, 우리나라로 치자면 [[순종(대한제국)|순종]]이나 [[영친왕]]이 [[이정재(조직폭력배)|이정재]] 급의 깡패에 대해 저런 짓을 묵인해주는 상황을 대입한다면 이해해 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빙쑤엔은 한 가지로만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빙쑤옌과 응오딘지엠의 싸움은 [[프랑스]]와 [[미국]]의 대리전이라고 볼 수도 있었으며, 빙쑤엔은 프랑스군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실제로 빙쑤옌 두목 바이비옌이 프랑스로 도주할 때도 프랑스군의 도움이 있었다.] 빙쑤엔의 패배로 프랑스는 완전히 베트남과 손을 끊게 되었고 남베트남은 미국의 책임이 되었으며, 빙쑤옌이 사라진 후 사이공에 [[베트콩]]들이 득실거리게 된 것으로 보면 그들이 비록 악했지만 그 시절에는 나름 필요악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와 별개로 비슷한 시기 이웃나라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과 대조하기도 한다. 바오다이나 시아누크나 무능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시아누크는 왕조와 상극인 크메르 루주와 제휴하면서까지 권력을 쟁취하려다 크메르 루주한테 뒷통수까지 맞고 자식들이 킬링필드로 살해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왕국 시대에 대한 캄보디아인들의 왕정 노스텔지어 분위기에 힘입어 1993년 왕정 복고에 성공했던 것과 반대로 바오다이는 누군가가 떠먹여주기만을 바라다가, 즉 권력의지 없이 살다가 객사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